칸트 이후 음악의 철학적 위상 변화와 헤겔의 ‘시간의 예술’로서의 음악 이론을 중심으로,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과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에 담긴 서사적 내러티브와 정신성의 철학적 의미를 깊이 있게 탐구한다. 음악이 감각적 쾌락을 넘어 이성과 내러티브를 결합한 고차원적 예술로 진화한 과정을 살펴본다.
헤겔 음악미학의 핵심: 음악은 '시간의 예술'이다
칸트는 음악을 일종의 쾌락적 예술로 분류하며, 개념이나 지성보다는 감각과 감정에 호소하는 낮은 단계의 예술로 생각했다. 음악은 형체가 없고, 공간을 점유하지 않으며, 논리적 사유보다는 감정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예술이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다. 하지만 헤겔은 『미학 강의』에서 예술은 인간 정신(Geist)의 외현화이며, 그 발전 단계는 건축 → 조각 → 회화 → 음악 → 시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이 중 음악은 시간을 매개로 순수한 정서와 개념을 드러내는 고차원 예술로 평가된다. 즉, 음악은 정신의 흐름을 시간 속에서 구현하는 예술, 다시 말해 '시간의 예술'로 규정한 것이다.
음악과 내러티브: 시간 속에서 전개되는 정신의 드라마
헤겔에게 있어 예술은 단순한 형식미의 추구가 아닌, 정신이 자기 자신을 인식해 나가는 과정의 형식화이다. 여기서 음악은 시각예술과 달리 공간이 아닌 시간 위에서 존재하며, 이러한 특성은 정신의 내적 운동, 즉 변화와 발전을 표현하기에 이상적인 매체인 것이다. 음악사적으로도 고전 음악 이후, 낭만주의 음악에서는 이러한 시간성을 활용해 주제의 도입–전개–갈등–해소라는 구조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는 마치 문학의 서사처럼 음악 속에도 감정과 사유, 역사적 서사를 녹여내는 방식인 것이다. 즉, 음악은 더 이상 단순히 아름다움을 제공하는 예술이 아니라, 철학적 사유와 내러티브를 전달하는 매체가 된다.
베토벤 교향곡 9번: 인간 정신의 변증법을 음악으로 그리다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합창 교향곡)**은 음악이 철학과 만나는 가장 인상적인 사례이다. 이 작품은 고전적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낭만주의적 정신을 강하게 드러내며, 고통을 통한 구원, 개인의 내면에서 인류 공동체로의 확장을 주제로 삼는다. 1~3악장은 개인적 고뇌와 갈등, 긴장을 축적시키고, 마지막 4악장에서 등장하는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 '환희의 송가'는 정신의 해방과 형제애의 이상을 노래한다. 이는 마치 헤겔의 테제–안티테제–종합 구조를 따르듯, 정신의 변증법적 자기 완성 과정을 음악으로 드러낸다. 베토벤은 이 작품을 통해 음악이 감정을 넘어 사상을 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고, 이는 이후 낭만주의 음악가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바그너 《니벨룽겐의 반지》: 신화, 권력, 자기 인식의 서사극
**리하르트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는 헤겔의 미학과 철학적 주제를 가장 전면적으로 구현한 음악 작품이다. 26년에 걸쳐 완성된 이 4부작(《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크프리트》, 《신들의 황혼》)은 단순한 오페라가 아니라, **총체예술(Gesamtkunstwerk)**로서 음악, 극, 신화, 철학이 통합된 거대한 정신적 내러티브다.《라인의 황금》에서는 권력과 탐욕, 질서 붕괴의 씨앗이 뿌려지고, 《발퀴레》에서는 신과 인간의 충돌, 《지크프리트》에서는 개인의 성장과 자유의지, 《신들의 황혼》에서는 질서의 붕괴와 새로운 세계의 탄생이 그려진다. 이 서사는 헤겔이 말한 역사란 정신이 자기 자신을 인식해 가는 과정이라는 철학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특히 지크프리트의 여정은, 외부 세계와의 충돌과 고통을 통해 **자기 인식(Self-Knowledge)**에 도달하는 구조로 전개된다. 음악은 라이트모티프(Leitmotiv)를 통해 등장인물의 정체성, 운명, 기억, 내면 상태를 반복적으로 상기시키며, 이들 사이의 변증법적 운동을 만들어낸다. 즉, 바그너는 음악을 통해 정신의 내적 서사를 드러내는 데 성공했으며, 이는 헤겔의 '정신의 드라마'를 예술로 재현한 대표적 예시라 하겠다.
시간 속 예술, 정신을 사유하게 하다
헤겔 이후 음악은 더 이상 ‘단순히 감각적인 예술’로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정신의 자각과 역사적 자기 이해를 시간 속에서 형상화하는 예술이 되었다. 베토벤은 고전 양식 속에 보편적 인류정신을 담았고, 바그너는 신화와 철학, 권력과 윤리, 자아와 역사 사이를 관통하는 서사를 만들어냈다. 이처럼 음악은 단순한 멜로디의 나열이 아닌, 철학적 사유를 실천하는 하나의 형식이며, 청자는 그 속에서 감정을 넘어서 정신의 움직임을 청취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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