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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학

한국 가곡 '보리밭'의 서정과 시대정신: 고향, 그리움, 그리고 계절의 기억

by World-Wish1-Music 2025.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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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서정가곡의 정수, ‘보리밭’. 전쟁 속 탄생한 이 곡은 고향과 어머니, 잊혀가는 추억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내며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립니다. 음악적 특징과 가사 해석을 통해 그 깊은 정서를 들여다봅니다.

 

 

보리밭

 

 

 

한국인이 사랑하는 가곡 중 하나인 ‘보리밭’은 단순한 자연의 풍경을 넘어, 전쟁과 이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서정적으로 담아낸 명곡이다. 6·25 전쟁의 혼란 속에서 탄생했지만,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이 곡은 한국 현대가곡의 정수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보리밭’의 탄생 배경, 음악적 특징, 가사의 상징성, 그리고 이 노래가 품고 있는 계절적·시대적 의미를 함께 고찰해보고자 한다.

 

 

'보리밭'의 탄생: 전쟁 속 피어난 노래

작곡가 윤용하, 작사가 박화목, 두 예술가는 1951~1952년 부산의 피난지에서 만나 이 노래를 함께 만들었다. 박화목은 종군기자, 윤용하는 해군 종군작곡가로 활동 중이었으며, 자갈치시장에서 술잔을 나누며 음악 이야기를 하던 중 탄생한 곡이 바로 '보리밭'이다. 특이하게도 이 곡은 일반적인 창작방식과는 달리 작곡가가 작사가에게 먼저 곡을 만들자고 제안한 사례이다. 박화목은 자신의 고향인 황해도 해주의 보리밭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시로 풀어냈고, 원래 제목은 ‘옛 생각’이었지만, 윤용하의 제안으로 지금의 ‘보리밭’으로 바뀌었다. 이 시는 곧 선율로 입혀져, 서민의 정서와 시대의 아픔을 아우르는 서정가곡으로 재탄생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KtQ5Zp9QvS8

수원시립합창단(1995) - 보리밭

 

 

음악적 구조와 표현기법

‘보리밭’은 내림라장조, 4/4박자, 보통빠르기의 곡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4마디의 전주와 36마디의 본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선율은 상행과 하행의 대비가 뚜렷하고, 3연음, 분산화음, 트레몰로 등 전통적 화성기법이 사용되어 부드럽고 서정적인 느낌을 준다. 특히 전반부는 낮은 음역에서 출발하여 점차 고조되며 중반부에 절정의 감정을 표현하고, 다시 부드럽게 내려오며 마무리된다. 이러한 선율의 흐름은 기억의 회상과 감정의 파동,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감정을 잘 드러낸다.

 

https://www.youtube.com/watch?v=un5HGb0sLoY&list=RDun5HGb0sLoY&start_radio=1

유채훈 - 보리밭

 

 

가사 속 상징과 정서 해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이 첫 구절에서부터 고요한 자연 속 환청, 즉 ‘허청(虛聽)’이 들린다. 실제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아니라, 전쟁과 이별로 인한 외로움이 만들어낸 마음의 소리인 것이다. 이 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과거를 회상하는 고독한 순간이 시작된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휘파람은 어린 시절, 혹은 고향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매개체이다. 이는 실제 노래가 아니라, 기억 속에서 다시 들리는 익숙한 멜로디, 또는 어머니의 자장가와 같은 따스한 위로의 감정일 수 있다.

 

"돌아보면 아무도 뵈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가사의 마지막 구절은 회상의 끝에 마주한 허무와 고독을 상징한다. 아무도 없는 보리밭, 그리고 저녁 하늘. 이 장면은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현실을 반영하며, 노스탤지어와 실존적 외로움을 강하게 드러낸다.

 

https://www.youtube.com/watch?v=1nrO3tKI77E

홍혜경 - 보리밭

 

 

시대적 의미: 한국 전쟁과 피난민의 감성

‘보리밭’은 단순히 한 개인의 고향 이야기라기보다, 한국 전쟁이라는 시대적 비극 속에서 고향을 등지고 떠나야 했던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1950년대 초반은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 상실감이 극심했던 시기이다. 이 노래는 그러한 상실감 속에서도 추억을 떠올리며 희망을 품는 사람들의 정서를 노래한다. 따라서 ‘보리밭’은 역사적 상처를 서정적으로 치유해 주는 노래이며, 동시에 그 시대를 살아낸 이들의 감성을 대변하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SKvI6Gi2ds8&list=RDSKvI6Gi2ds8&start_radio=1

고성현 - 보리밭

 

 

계절성과의 연결: 봄과 보리, 그리고 기억

보리는 이른 봄에 자라 초여름에 익는 작물이다. 한국인의 기억 속에서 보리밭은 봄의 상징이자, '보릿고개'라는 고난의 시간과도 연결된다. 하지만 보리는 궁핍한 시절을 견디게 해 준 생명의 상징이기도 하다. 따라서 ‘보리밭’의 배경이 되는 풍경은 단순한 들판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도 살아가는 생명력, 그리고 봄의 부드러운 위로를 함께 품고 있다. 계절이 주는 감성적 분위기와 노래가 어우러지며, ‘보리밭’은 가난과 그리움, 그리고 새 희망이 교차하는 장소로 그려진다.

 

https://www.youtube.com/watch?v=ln6cei3vblA

조수미 - 보리밭

 

 

대중적 수용과 현재의 가치

초기에는 큰 반향을 얻지 못했던 ‘보리밭’은 1970년대 들어 다양한 가수들에 의해 다시 불리며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합창곡, 독창곡, 성악곡 등 다양한 편곡으로 재탄생하면서 세대를 넘나들며 불리고 있다. 지금은 교과서에도 실리는 대표 가곡이 되었고, 많은 한국인이 자신의 ‘고향의 기억’을 투사할 수 있는 공감의 창이 되었다. 이는 ‘보리밭’이 시간을 넘어선 감정의 보편성을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인의 정서를 품은 서정가곡

‘보리밭’은 단지 한 시대의 산물이 아닌, 한국인의 마음과 역사를 아우르는 서정가곡이다. 봄이라는 계절적 배경과 전쟁이라는 시대적 특성이 어우러져, 이 곡은 아련함과 외로움, 그리고 희망과 회복의 감정을 함께 전달한다. 우리가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느끼는 감동은 단순한 향수 그 이상이다. 어떤 상실도 기억과 사랑으로 되살아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 바로 '보리밭'이 지금까지 사랑받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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